냉장고 문을 열면 차가운 공기가 먼저 얼굴을 스친다 그 순간 잠깐 정신이 또렷해지는 것 같다가도 막상 문을 연 이유를 떠올리려 하면 머릿속이 하얘진다 분명 뭔가를 찾으려고 일어났고 발걸음도 자연스럽게 냉장고 앞으로 향했는데 문을 열고 난 뒤에는 이유가 사라져 있다 손은 문을 붙잡고 있는데 생각은 이미 어디론가 흩어져 버린 느낌이다 그 허무함과 멍함이 묘하게 섞인 시간이 몇 초간 이어진다 이럴 때면 내가 왜 여기 서 있는지부터 다시 생각하게 된다.

처음엔 물을 마시려고 했던 것 같은데, 아니면 반찬을 꺼내려고 했던 것 같고, 혹시 간식을 찾으려고 했던 건지도 모르겠다 여러 가지 후보들이 머릿속을 스쳐 지나가지만 어느 것도 확신할 수 없다 냉장고 안의 불빛만 멀뚱히 바라보다가 문 안쪽에 붙은 메모지나 정리된 칸들을 보면서 억지로 기억을 끌어내 보지만 쉽지 않다 그렇게 냉장고 앞에서 쓸데없이 진지한 표정으로 서 있는 내 모습이 갑자기 우스워지기도 한다 순간 나는 내 기억력의 한계와 일상의 느슨함을 동시에 마주하게 된다.
생각이 사라지는 건 단순히 깜빡함 때문이 아니다 하루 동안 지나친 정보와 자잘한 고민들이 머릿속을 가득 채우고 있기 때문에 작은 행동 하나도 기억의 틈 사이로 흘러 빠지기 쉽다 특히 피곤한 날이나 생각이 많은 날이면 이런 일이 더 자주 생긴다 잠깐의 휴식을 위해 물을 마시려 했던 것도 잊어버리고, 허기가 져서 뭔가를 찾으려 했던 것도 흐려진다 바쁘게 사는 것 같으면서도 동시에 정신은 어디에 가 있는지 모를 만큼 여유 없는 삶의 흔적이기도 하다.
냉장고 문을 연 채 멍하니 서 있는 동안 주변의 소리도 흐릿해진다 부엌의 조명 아래에서 차갑게 빛나는 냉장고 안을 바라보면 시간감각마저 잠시 멈춘 것처럼 느껴진다 그러다 갑자기 ‘아 맞다’ 하고 떠오를 때도 있지만, 끝내 떠오르지 않고 그냥 문을 닫는 날도 있다 그런 날은 문을 닫는 소리가 유난히 공허하게 들린다 다짐해 보듯 냉장고 문을 닫아도 마음속에 남는 찜찜함은 금방 사라지지 않는다 결국 나는 뭔가를 찾기 위해 다시 냉장고를 열지도 모른다는 생각이 든다.
또 희한한 건 냉장고를 열기 전엔 머릿속에서 하고 싶은 일이 분명했는데, 문을 여는 순간 시선이 다양한 것들에 빼앗기면서 원래 목적이 지워져 버린다는 것이다 반찬통이 보이면 ‘이거 언제 먹지’ 하는 생각이 들고, 음료수가 보이면 ‘이건 아직 남았나’ 확인하게 되고, 먹을 생각이 없던 디저트까지 괜히 손이 간다 냉장고 속의 풍경이 너무 많은 정보를 한꺼번에 던져서 원래 의도를 잊게 만드는지도 모르겠다 마치 눈앞의 것들이 기억을 밀어내는 것처럼.
이런 순간은 나 혼자만의 문제가 아니라는 걸 알기에 조금 위안이 되기도 한다 누구나 하루에 한두 번쯤 이런 멍함을 겪는다 다 큰 어른도, 바쁜 사람도, 완벽해 보이는 사람도 냉장고 문 앞에서는 어쩐지 평등해진다 살아가며 똑같은 실수를 반복하는 것도 삶의 일부라는 걸 새삼 깨닫게 된다 오히려 이런 사소한 순간들이 내가 너무 빠르게만 살고 있지 않나 돌아보게 하기도 한다 정신이 잠깐 붕 떠 있는 시간은 어쩌면 몸과 마음이 쉬라고 보내는 신호일지도 모른다.
문득 다시 떠오른 이유 때문에 냉장고 문을 한 번 더 열어보면 그제야 마음이 정리되는 경우도 있다 잊은 이유가 별 것 아니었다는 걸 알면 허탈하면서도 웃음이 난다 물 한 잔 마시면 훨씬 편해질 테고, 간단한 간식 하나로 허기가 가라앉을 테고, 반찬을 꺼낼 마음이 생기면 저녁 준비도 변한다 이렇게 다시 문을 열어 기억을 되찾는 과정에서 마음도 조금은 느슨해진다 복잡했던 생각이 잠시 가라앉으며 나를 다시 안정시키는 순간이 되기도 한다.
그래서 냉장고 문을 열었다가 왜 열었는지 잊어버린 날은 그냥 실수로 끝나는 게 아니다 잠시 멈춰 서서 마음을 들여다보는 작은 쉼표가 되기도 한다 너무 바빠서, 너무 생각이 많아서, 너무 지쳐서 기억이 사라져버린 그 자리는 사실 나에게 필요한 숨이었다 그렇게 냉장고 앞에 멈춰 선 그 몇 초가 어쩌면 하루 중 가장 사람다운 순간일지도 모른다 다시 문을 닫으며 느끼는 가벼운 웃음 속에는 살아가는 여유가 조금 담겨 있다 오늘도 나는 냉장고를 열었다가, 잊었다가, 다시 떠올리며 그렇게 하루를 살아간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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